티스토리 뷰

장승과 돌하르방은 외모뿐만 아니라 기능도 조금씩 다르다. 장승은 종교적인 기능이 강한 반면 돌하르방은 기능이 약하고 성곽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제주도가 급속도로 도시화되면서 돌하르방은 원래 위치에서 원래 위치로 옮겨갔다. 현재 제주대학교, 제주시청, 제주KBS방송국, 제주공항,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목석원 등에 흩어져 있다. 삼성 혈통의 관덕정과 돌하르방은 원래 없었다. 돌하르방은 제주 목·정의현·대정현 읍성 주변에 밀집되어 있으며, 인근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를 근거로 돌하르방이 읍성의 수호신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시신의 몸에는 문지기 역할을 했던 정자를 덮은 구멍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 돌하르방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이원진이 1653년(효종 4)에 편찬한 탐라지에는 "옹중석(옹중석)이 제주읍 동서남북의 삼문 밖에 있었고, 김몽규가 영조 30년(1754년)에 창건하였지만, 삼문 철거로 인해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어옹정과 절은 삼성사 입구로 옮겨졌다." 그러나 김몽규가 석상을 세웠는지, 원래의 석상을 대문 앞으로 옮겼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돌하르방은 1754년경에 존재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돌장승의 대표작인 나주 운흥사의 장승은 1719년에, 남원 실상사의 장승은 1725년과 1731년에 각각 만들어졌다. 돌하르방이 열렸던 1754년은 가장 뛰어난 돌장승이 만들어진 시기였다. 그렇다면 돌하르방은 조선 후기에 전국으로 퍼진 돌장승 문화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돌장승이 가장 많은 지리산 자락에 있는 남원휴리장승은 돌하르방과 매우 비슷하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으로,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고 있습니다.

댓글